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완독했습니다. 기록을 보니 23년 10월에 책을 구매했는데 이제서야 다 읽었네요. 사실 책을 구매한 직후 100페이지 정도 읽고 언젠가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만 두었습니다. 한참 뒤 올해 5월 28일에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10월 12일에 다 읽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무려 네 달 반 동안 천천히 읽었지요. 완독하는 데에 가장 오래 걸린 작품입니다. 다만, 천천히 읽은 것치고는 책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처음 읽을 때 체감 난이도는 살면서 읽은 웬만한 논문보다 더 복잡한 수준입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전 세계적으로 극찬을 받는 소설입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이유에는 인류사 통틀어서 손꼽히는 좋은 책이라는 평가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책을 구매하기 전, 본 작품에 대한 한줄평을 읽어봤습니다. 톨스토이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존경도 놀라웠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평가는 코트 보니것의 아래의 찬사였습니다. 이쯤되니 직접 작품을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인생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은 모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안에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썼던 또 다른 작품인 죄와 벌과 비교하자면 본 작품이 훨씬 난해합니다. 솔직히 죄와 벌은 읽기 쉬운 편에 속한다고 생각해요. 대개 러시아 장편 소설들이 무서운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작품 속의 수많은 등장인물들이죠. 등장인물들의 숫자가 많아서 복잡한 인간관계를 기억해야할 뿐만 아니라 각각의 인물의 애칭 혹은 별명도 여러 개라서 독자들을 헷갈리게 합니다. 영어권 이름이라면 사전지식이 있지만 러시아 인명의 관습적인 애칭은 알지도 못하고 익숙한 작명 스타일도 아니라서 작품을 읽기 시작한 초입부에 우리들을 상당히 곤란하게 만듭니다. 두 번째 이유는 책의 분량입니다. 가뜩이나 어려운 걸로 유명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한글 번역된 버전이 1600페이지 가까이 되니 읽기 시작하는 데에 큰 결심이 필요합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등장인물이 많고 분량도 많지만 읽다보면 금방 인물관계도가 머릿속에 정리되어서 괜찮습니다. 이 작품이 어려운 진짜 이유는 작가가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전달하는 철학적인 논제들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했던 주제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작품 속 그 각각의 주제들에 대해서 등장인물의 행동과 대화를 통해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는 작가의 질문에 벽 느꼈습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천재라고 느꼈던 이유는 다중인격자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가 하나의 주제에 대해 여러 관점을 제시하면서 생각할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등장인물의 감정 교류 대화와 대심문관 이야기로 대표되는 작가의 가치관을 중점적으로 다루겠습니다.
등장인물의 감정 교류 대화와 작가의 삶을 대하는 가치관
매력적인 캐릭터와 감정선 묘사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느꼈던 놀라움은 작가의 심리 묘사와 등장인물 간의 감정 교류에 대한 서술이 정말 치밀하게 잘 짜여졌다는 것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섬세한 심리 묘사 문체는 전에 읽었던 작품 덕분에 이미 익숙했으나, 등장인물의 복잡한 내면과 그들 사이의 대화 속에서 일렁이는 감정 동요를 글로 표현한 부분은 마치 작가가 완벽하게 꿰고 있는 실존 인물들의 감정선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비유하자면 등장인물이 정말 오랫동안 친하게 알고 지낸 사람이라서 특정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식으로 감정 변화를 겪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특히 드미트리 카라마조프, 이반 카라마조프, 알료샤 카라마조프, 카체리나, 그루셴카의 캐릭터 묘사는 굉장히 흡입력 있어서 매력적이었습니다.
소설 초반에는 카체리나와 이반, 알료샤와 리즈의 대화에서 서로에 대한 감정선의 묘사가 재밌었습니다. 카체리나와 이반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며 회피형 성향을 보이는데, 이반은 자신이 불안정하다고 느끼고, 카체리나는 드미트리와의 일 때문에 망설이죠.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누르고 마음을 포기하려 하기에 서로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는 장면 묘샤가 제게는 소설에 점점 빠져들도록 하는 장치였습니다. 리즈는 알료샤의 순수함과 따뜻함에 끌리면서도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래서 오히려 상처 주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이 장면에서 실제 현실 인물들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카체리나와 리즈는 조금 다른 성격이지만 불안정한 감정에 따른 충동적인 행동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작가가 인간의 방어기제와 감정의 왜곡을 아주 세밀하게 그려내는 묘사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 리즈의 성향은 우리가 보통 긍정적인 의미로 불같다고 표현하는 열정적인 성향과는 다릅니다. 그냥 감정 기복이 심한,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성격이라 제가 좋아하지 않는 유형이지만, 마치 실존하는 인물을 그린 것마냥 현실적인 캐릭터라서 소설 속에 몰입하게 만드는 인물입니다. 아마 리즈는 표면적으로만 가르침을 흡수하고 자기 과시에 빠진, 당시 러시아 상류층을 대표하는 호흘라코바 부인의 성격에 영향을 받았을까요?
그리고 일류샤 아버지가 알료샤가 건넨 돈을 버리는 행동에 대해 알료샤가 곰곰이 분석하면서 그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왜 그러한 행동을 했는지 생각을 전개하는 내용에 감탄했습니다. 저는 알료샤와 달리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잘 읽지 못하고, 사람 간의 미묘한 감정 교류에 약해서 해당 장면이 너무나 인상적이었어요. 알료샤는 일류샤의 아버지가 왜 화를 냈는지만 보는 게 아니라 그 화의 이면에 있는 수치심, 자존심, 사랑, 모멸감까지 모두 감싸 안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태도야말로 작가가 이상적으로 바라본 인간 이해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정의 뿌리를 추적하고 공감하려는 알료샤의 태도에서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제가 이 소설에 빠져들게 된 시작은 대화 장면에서 느낄 수 있었던 말로 표현되지 않는 감정을 감지하고 싶다는 욕구와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시선에 대한 끌림이었습니다.
대심문관 이야기
이반의 대심문관 이야기와 악마와의 대화는 흥미로운 논제입니다. 작가의 종교에 대한 철학적인 생각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매개로 적절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해요. 대심문관 이야기에서 이반의 주장은 사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 번쯤 하는 생각일 겁니다. 저는 불가지론에 가까운 종교관을 가지고 있으나, 불합리한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례를 마주쳤을 때 이반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적이 많습니다. 신이 말하는 원리대로 흘러가지 않는 현실입니다. 신이 존재할 수 있겠으나 신이 정말 선하다면 현실에서 죄없는 사람들이 왜 억울한 일을 당해야 하나요? 이반은 신이 창조한 이 세상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받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기에 신을 거부합니다.
악의 문제를 아시나요? 이반이 알료샤에게 대심문관 이야기를 꺼낼 때 저는 악의 문제가 떠올랐습니다. 신이 절대선이라면 악이 존재하는 모순에 관한 문제입니다. 나무위키를 보면 아래와 같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신이 악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는가? 그렇다면 신은 전능하지 않다.
신이 악을 막을 능력은 있는데 의지가 없는가? 그렇다면 신은 선하지 않다.
신이 악을 막을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가? 그렇다면 이 세상의 악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신이 악을 막을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는가?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를 신으로 불러야 하는가?
이반의 말에 따르면 신이 인간에게 준 자유 의지는 나약한 인간들에게는 버거운 짐입니다. 자유 의지는 인간에게 도덕적 책임을 부여하기 때문에 인간은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지만 그 선택의 결과와 고통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 져야 합니다. 귀찮아지죠? 그러니 신이 내린 고차원적 선물인 선택의 자유는 인간을 불편하게 할 뿐이라는 겁니다. 결국 인간은 자유보다 당장의 굶주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존재, 자신에게 믿음을 강요할 수 있는 기적과 권위, 자신의 양심과 자유와 상관없이 권력에 의한 복종할 대상을 찾습니다. 따라서 이반은 대심문관의 질문을 통해 인간에게 자유를 준 결과가 끊임없는 고통과 혼란이라면 차라리 그 자유를 박탈하고 모두가 행복한 노예로 사는 것이 더 좋을 수 있지 않냐고 묻는 건데요, 이는 “자유가 반드시 선한 것인가?”라는 질문과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 작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이반의 주장에 대한 작가의 대답입니다. 대심문관은 신이 내린 자유 의지를 잘못 이해했습니다. 단순히 신학적인 측면으로 해석해도 신을 믿는 즉시 선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로 인한 고통은 인간의 내면에서 싸움을 유발하나, 우리 인간이 외롭게 사유하는 게 아니라 신이 함께하기에 버틸만하다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신을 믿든 안 믿든 상관 없게 됩니다. 결국 알료샤가 작품 속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삶을 사랑하는 실천적인 자세가 이반이 제시한 딜레마에 대한 대답입니다. 저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연민과 헌신이 진정한 가치라고 이해했습니다.
이반이 자신의 상상 속 악마와 대화하는 장면은 솔직히 가볍게 읽다가 작가의 표현 때문에 놀랐습니다. 찰나의 시간 동안이라도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면 영겁의 시간을 걸을 수 있다는 비유를 위해 작가는 1000조 킬로미터로 표현하였습니다… 신을 부정하는 이반이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신의 존재를 찾아서 구원받고자 하는 내면 속 진심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얼마 전에 모노노케 히메가 재개봉 해서 봤는데, 이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더라구요. “살아라, 그대는 아름답다.”.
마무리
작품 내내 알료샤를 닮고 싶었습니다. 알료샤와 대화하는 모든 사람은 그를 사랑하고 감화되기 때문입니다. 알료샤의 대화 방법과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본받고 싶었습니다. 알료샤는 숨은 진심을 포착하고 그걸 인정하려 해요. 이는 알료샤의 큰 힘이자 순수함이 세속적 계산과 시험을 어떻게 이겨내는가를 보여줍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시험하고, 상처 주지만 진심과 존중은 결국 다른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게 합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왜 위대한 소설인지 직접 알게 되어 기쁩니다. 몇 년 뒤 다시 읽을 땐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요. 이 소설을 재밌게 읽은 이유는 네 가지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철학, 종교, 문학, 사회 경계를 넘나드는 깊은 이야깃거리입니다. 둘째, 등장인물들이 모두 무언가의 상징(이해와 사랑, 무신론, 육체적 본능, 허위 등)이자 살아있는 인간처럼 입체적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도스토옙스키 특유의 격렬한 심리 묘사와 대화체 구성입니다. 덕분에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과 내면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이유는 도덕적 모호성과 인간 존재의 복잡함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특히 소설 끝부분에서 재판하는 내용까지 읽고나서 드미트리, 카체리나, 그루셴카의 행적을 돌아봤을 땐 인간이 이렇게나 복잡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지금은 열린책 출판사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