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캠 글쓰기 모임 5회

“아르센 벵거: 무패의 전설”, “리버풀 FC: 엔드 오브 스톰” 감상문

먼저 이 글을 읽으시는 당신이 레알 마드리드의 팬이라면 오늘 29일 새벽에 열린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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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동력이 밀려서 중원을 내주더라도 일단 무조건 크로스, 카세미루, 모드리치를 선발로 내세운다.
  2. 쿠르투아가 막는다.
  3. 벤제마나 비니시우스한테 공을 준다.
  4. 벤제마나 비니시우스가 골을 넣는다.

어쨌든 이 방법으로 챔스 결승까지 올라왔고, 결국 우승했습니다. 오늘 리버풀이 계속해서 레알 마드리드를 가두고 두들겼지만 하늘이 리버풀 편이 아닌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
- 항우 -


저는 축구를 좋아합니다. 빅클럽 경기들은 거의 항상 챙겨보는 편이고 평소에 축구 관련 글이나 영상도 자주 봅니다. 며칠 전에 왓챠에서 “아르센 벵거: 무패의 전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봤습니다. 비록 아스날 팬은 아니지만 제가 좋아하는 감독이라 자서전까지 갖고 있습니다. 몇 달 전에는 “리버풀 FC: 엔드 오브 스톰”이라는 다큐멘터리도 봤습니다. 벵거 감독과 마찬가지로 리버풀의 위르겐 클롭 또한 제가 좋아하는 감독입니다. 생각해보니 훨씬 전에는 토트넘 다큐멘터리 “All or Nothing : Tottenham Hotspur”도 봤었네요. 이번 글에서는 먼저 소개한 두 다큐멘터리를 보고 느낀 점을 써보려고 합니다.

정식 명칭은 Premier League, 흔히 EPL(English Premier League)이라고 불리는 곳은 20개 팀이 경쟁하는, 축구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조차 가장 익숙할 최상위 축구 리그입니다. 매 시즌마다 수천 억원을 지출하는, 아마 선수단 및 코치진의 연봉과 시설 유지비를 포함하면 5000억을 가뿐히 넘는 일 년 예산이 필요할 수 있는 프리미어 리그의 빅클럽에서 감독직을 수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갓 성인이 된 나이 어린 선수들조차 연봉도 아니고 주급을 억대로 받는 곳이 프리미어 리그입니다. 자존심 강한 세계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갖춘 선수들이 모인만큼 그들을 통제하고 훌륭한 조직력을 유지하는 건 당연히 어렵습니다. 최근 일부 PL 클럽의 박살난 조직력과 파벌로 인해 어수선한 선수단 분위기가 비판 받으면서 저는 감독의 전술적 역량보다 선수단이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리더쉽이 더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인화단결(人和團結). 특히 손흥민이 득점왕 타이틀을 따낼 때 토트넘 전체가 한 마음으로 응원하면서 골을 넣을 수 있는 상황을 어떻게든 만들어주고, 진심으로 함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 노리치 원정 경기 당시 쿨루셉스키가 완벽한 득점 찬스에서 슈팅하지 않고 손흥민 선수에게 양보하려는 시도는 비록 실패했지만 발이 꼬인 상태에서 어떻게든지 공을 넘겨주려는 행위는 감동적이었습니다. 슈팅하려던 순간 갑자기 시야에 들어온 팀 동료를 위하려다가 완벽한 기회를 날리는 모습, 저는 이런 걸 유럽 축구에서 본 적이 없었습니다. 평소에 토트넘 선수단이 얼마나 단결된 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손흥민 선수의 인망이 얼마나 두터운지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벵거와 클롭 감독의 전성기는 조금 다르지만 힘든 상황 속에서 부임해서 구단을 단결된 하나의 팀으로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리버풀 다큐멘터리는 클롭이나 구단에 대해 고찰하지 않습니다. 그저 오랫동안 침체된 구단 분위기와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예상치 못한 상황 속에서 클롭 감독의 지도 아래 리버풀이 버티고 견뎌낸 끝에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만 할 뿐입니다. 수많은 역경을 함께 헤쳐나가는 와중에 클롭의 고뇌와 생각을 알 수 있었던 다큐멘터리였습니다.

You’ll Never Walk Alone.

리버풀의 응원가이기도 한 이 슬로건은 다큐멘터리의 핵심 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게겐프레싱이라는 압박 축구로 유명한 클롭은 전술적으로도 훌륭한 능력을 보여주는 감독이지만 단지 상대팀에 맞는 적합한 전술을 펼치는 것만으로는 우승하지 못합니다. 클롭은 리버풀에 오자마자 자신이 당장 고칠 수 있는 문제들을 정의한 후에 하나씩 해결했습니다. 사소한 것처럼 느껴지는 문제들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클롭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통제광이 아니지만 일을 제대로 하려면 제대로 된 환경을 먼저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합니다. 먼저 각 포지셜별로 보완이 필요한 부분에 자신이 원하는 선수를 새로 채우기 시작했고, 새롭게 만들어진 선수단을 하나의 팀으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함께 하게 했습니다. 수영, 세례식과 같은 활동을 통해 똑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게 했습니다. 여기에 선수단과 구단을 응원하는 서포터들이 서로 친숙한 문화를 만들어내면서 하나의 팀이라는 의식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리그가 잠시 중단되고 봉쇄된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훈련하지는 못해도 개인적으로 훈련하는 영상과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냈는지를 매일 공유하면서 단결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의 팀을 끝까지 유지한 덕분에 그동안 힘들었던 폭풍 속을 빠져나와 우승을 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반면에 아르센 벵거 감독의 아스날에서의 모습을 돌아보는 “아르센 벵거: 무패의 전설”은 축구와 삶에 대한 그의 철학을 보여줍니다. 아르센 벵거는 90년대 중반에 아스날에 와서 2018년까지 감독직을 수행했습니다. 축구팬이라면 아시겠지만 한 구단에 이토록 오래 머무르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현대 축구에서는 3년만 근무해도 오래 있었다는 평가를 받으니까요. 이는 벵거 감독의 능력을 증명하는 동시에 아르센 벵거와 아스날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겠지만 벵거는 이제는 현대 축구에 익숙한 많은 부분을 처음 도입했던 혁신적인 인물입니다. 이전에는 없었던 식단관리, 체계적인 훈련, 벵거볼로 불리는 패싱 플레이 등이 지금은 축구계에서 당연한 내용이 되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저는 벵거 감독의 열정과 몰두하는 모습에 감탄했습니다. 어쩌면 제게 가장 부족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살면서 무언가에 저렇게 세심하게 몰두하고 체계적인 삶을 살아본 적이 있나 의문이 듭니다. 또한 커다란 목표를 세운 다음에 선수단에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하나의 팀으로서 나아가자고 독려하는 모습은 벵거의 가치관과 승부욕을 보여줍니다. 무패 우승을 하겠다는 2002년 당시 벵거의 발언에 모두가 미쳤다고 말했지만 결국 그는 그 발언을 한지 2년 후였던 03/04 시즌에 무패 우승을 이뤘습니다.

“감독님께서는 우리가 힘을 모으면 팀으로서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 비전을 가지고 있었어요.”
- 파트리크 비에이라 -

“불가능한 목표를 달성하려면 그걸 머리에 심어두고 싹을 틔울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그 꿈이 불가능해 보일수록 의욕은 더욱 고취되는 법이죠.”
- 아르센 벵거 -

위에 썼듯이 벵거는 지금 기준으로 PL 최초이자 마지막 무패 우승을 달성했고, 리그 49경기 연속 무패라는 대단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49경기 무패 기록은 지금까지 어떤 PL 팀도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와 자서전에서 벵거는 무패 우승 기록보다 그 목표까지 달려가는 과정에 있었던 하나하나의 순간에 집중해달라고 말합니다.

인생은 밀리미터의 싸움이고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무패 기록에 대해 얘기할 수밖에 없겠지만 밀리미터로 나눈 인생을 들여다보면 무패 얘기는 안하게 될 거예요.

매 순간 그가 느꼈던 감정과 경험,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내렸던 판단에서 저는 인간미를 볼 수 있었습니다. 벵거가 아스날에 몸담았던 과거를 하나씩 되짚으면서 지금 와서 말하는 솔직한 생각과 후회를 듣고 나서 그를 존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로운 경기장(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을 건설하는 것 때문에 구단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좋은 유망주를 찾아내서 키우고,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힘겹고 외로운 싸움을 하는 동안 그의 고뇌와 아스날을 향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리그에서 4위하는 게 지겹다며 성적 부진을 이유로 아스날 팬들의 비난을 받고 2018년에 사임하는 모습은 안타깝기도 하고 동시에 어이가 없습니다. 아실 분들은 아시겠지만 벵거 이후 아스날은 단 한 번도 4위 안에 든 적이 없습니다. 당장 작년 시즌엔 8위였습니다.

하이버리는 내 영혼, 에미레이츠는 내 상처였다.

두 다큐멘터리 모두 감상 직후의 저에게 큰 감동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물결처럼 밀려와 제 머리속과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어쩌면 자기계발서를 보거나 강연을 듣는 것보다 이런 다큐멘터리를 감상하는 게 더 많은 가르침을 잘 전해주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