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전선 이상 없다(2022, 넷플릭스)

WW1 종전 기념일 하루 전에 본 영화

난 언제나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1차 세계대전보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겠다고 말했다. 1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만큼 꿈도 희망도 없는 끔찍한 전장이 얼마나 더 있을까?

어제 새벽 넷플릭스에서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봤다. 원작 소설을 읽어본 적 없지만, 예전부터 소설이든 관련 영화든 보고 싶었던 작품이다. 좋았다. 딱히 볼만한 게 없는 것 같아서 아마 올해 영화관을 가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우연히 보게 된 올해 넷플릭스 영화가 좋은 작품이었다. 1차 세계대전을 다룬 작품으로선 “1917”만큼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영화관에서 볼 수 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영화는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한 후, 전투복을 벗겨내고, 전투복에서 핏물을 빼고 수선해서, 다시 신병에게 지급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다른 이의 이름이 적혀있어서 전투복을 잘못 지급받은 줄 아는 주인공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아마 전투복이 작아서 반품되었을 거라고 말하며 이름표를 뜯어 버린 후에 다시 돌려주는 입영심사관의 연출이 인상적이었다. 이 흥미로운 전개 덕분에 초반부터 영화에 몰입하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이전은 벨 에포크 시대이다. 오랫동안 유럽에는 큰 전쟁이 없었고, 사람들은 빠르게 발전하는 문명 사회를 만끽했다. 물론 빈부격차가 심해서 하층민들은 고통받았던 어두운 면도 있지만 사람들은 이때가 대체로 평화롭고 낭만적인 시대라는 것에 동의한다. 또한 지금처럼 전쟁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영상이나 사진도 없었으며 오히려 전쟁에서 활약한 영웅들의 이야기에 심취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났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금방 다녀올 소풍가는 것마냥 신나서 자원 입대하는 모습이 많이 남아있고, 이는 영화 속 주인공 일행의 모습에도 나타난다. 전쟁이 사람의 영혼을 얼마나 파괴하는지 잘 몰라서 그랬을 것이다. 그 시절 유럽 사람들은 전선에 나가지 않는 사람을 겁쟁이라고 매도했고, 흰 깃털을 꽂아주면서 입대하라고 몰아세웠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민간인들은 전쟁의 무서움을 직접 느낄 수 없었을테니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이루어질 수 있었으리라. 실제로 이후에 일어난 전쟁에서는 무기와 전략, 전술의 발전으로 인해 전선이 고착화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후방에 있는 대도시가 쉽게 공격 받고, 민간 시설에 대한 대규모 폭격이 발생하면서 민간인 사상자도 급격하게 증가했다. 아무튼 아직 사는 법도 모르는 어린 학생들이 자기가 죽을지도 모르는 전쟁놀이를 하러 들떠서 함께 입대하는 장면은 나를 착잡하게 했다.

전선에 도착하자마자 신병들의 머릿 속에 있던 영웅 이야기에 대한 환상이 개같이 멸망하는 것은 반전 영화의 클리셰이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주인공 일행은 상상했던 모습과 다른 열악하고 끔찍한 전장의 모습에 실망한다. 몇 년 동안 고작 수백미터를 옮겨다니며 고착화된 전선은 시체와 포탄 구덩이밖에 없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땅이다. 주인공 일행은 시체 파먹는 쥐가 우글거리고, 배수가 안되면 하루종일 발을 더러운 물에 담그고 있을 수밖에 없는 그런 참호에서 살았을 것이다. 주인공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조언을 해주는 경험 많은 군인의 모습은 내 군대 생활을 떠올리게 했다. 평화로운 시기의 군대 생활에서도 간단한 팁조차 많은 도움이 되는데 지옥같은 실제 전쟁터에서 듣는 조언은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소중한 가르침일 것이다.

또한 영화는 당시 신무기였던 탱크의 등장에 부대 전체가 모랄빵나서 전선에서 밀려나가는 모습을 잘 표현했다. 제대로 된 대전차 무기가 없는 와중에 어떻게든 적 탱크를 돈좌시키려고 분대 단위로 분전하는 독일군의 모습은 절망 속에서 한 줌의 기대를 갖게 하는 전장의 지옥을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잠시 후방에서 재정비하는 동안 맞이한 한가한 시간에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는 장면은 영화를 감상하고 있던 나도 잠시 긴장을 풀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장면은 특히 명예욕에 미친 장군 때문에 더 부각되었다. 합의된 종전 시점까지 고작 몇 시간 남은 순간에도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모습에 화가 났다. 그저 전쟁에 미친 무능한 장군이 없었다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각자 평화로운 삶을 살았을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허망하게 죽었다.

여담으로 사실 당시 전쟁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눈 여겨 봤을 장면들이 또 있다. 독일군은 먹을 게 항상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데, 연합군은 보급이 풍부한 것처럼 보인다. 당시 독일은 징집 때문에 충분한 식량 생산을 위해 필요한 인원이 부족했다. 뿐만 아니라 식량 수입이 어려웠기 때문에 최전선의 군인이 먹을 음식도 부족했다. 그래서 그나마 빠르게 식량을 수급할 수 있는 순무가 재배되었는데, 거의 모든 음식을 순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고기 요리, 커피, 빵 등등 떠올릴 수 있는 거의 모든 메뉴를 순무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물론 순무만으로는 충분한 영양을 제공받을 수 없었고, 이마저도 양이 부족했다. 이 상황에 질려서 사람들은 당시를 “순무의 겨울”이라고 불렀는데, 하필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우연히 본 TV 프로그램에서 순무가 나왔다. 순무가 맛있다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순무가 맛있다고? 돌았구만”이라는 반응을 룸메한테 했다.

최근 영화관에서 괜찮은 영화가 없는 것 같아서 예전 영화나 재개봉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넷플릭스로 오랜만에 남들에게 추천할만한 좋은 작품을 만나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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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냥 글 쓰고 싶어서 오랜만에 영화 감상문을 써봤습니다! 104주년째 종전기념일에 감상문을 쓰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