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장려 정책에 대한 내 생각

가벼운 존재와 무거운 존재

얼마 전 친구와 우리나라의 저출산 현상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도중에 이와 관련해서 나는 국가적 차원에서 비혼과 이혼 따위를 소재로 하는 방송 프로그램의 빈도를 줄이는 조치가 어쩌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적어도 아름다운 결혼과 육아를 소재로 한 작품을 장려하는 정책이라도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온전한 두 인격체가 함께 살아가며 겪을 수 있는 갈등과 아이를 키우는 데서 맞닥뜨릴 어려움을 감수하고서라도 동시에 경험할 결혼에 대한 환상을 심어줄 프로파간다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결혼과 육아 둘 다 경험해보지 않는 나의 철없는 소리라고 들릴 수 있겠다.

친구는 내 의견에 반대했다. 비록 저출산 현상이 심각하고, 미래에 우리 사회가 그로 인한 대가를 치르게 되더라도 그런 국가 정책은 지나치다고 말했다. 자연스러운 사회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저출산으로 인해 겪을 대가를 방지하려고 하는 그 목적 자체가 “우리”가 아닌 “나”를 위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었다. 즉, 미래의 내가 떠안을 부담이 싫은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 사실 내가 너무 큰 관점에서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자문했을 정도로 당시의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다가 사비나의 이야기 속에서 공동체 속 개인에 관해 생각할 계기가 있었다. 생각이 이어지다가 그때의 대화가 떠올랐다. 친구의 주장은 개인적인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나의 주장은 공동체, 우리 사회, 국가의 관점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니까 친구의 말에 따르면 저출산 현상 속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의무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없다. 이 또한 사회 현상이고, 하나의 개인으로서 움직이는 사회구성원들 각자의 선택을 국가가 간섭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친구는 나의 발언을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나”를 위한 이기적인 주장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 친구의 견해가 개인적 차원에서 너무 좁게만 살아가려는 극단적 방임주의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현상황이 지속되었을 때 다가올 미래에도 개인의 행복추구권이 무조건적으로 보장되겠는가? 어쩌면 책 속 사비나가 어린 시절 경험의 영향으로 공동체 의식에 관심이 적은 것처럼 평소 역사와 국가 통치 정책에 관심이 많은 나라서 이러한 결론에 이르렀을지도.

친구 말마따나 심각한 저출산으로 인해 젊은 인구가 급격하게 줄어든다고 해도 현상을 그리 나쁘지 않게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 인구가 감소하면 쾌적해진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좁은 면적에 너무 많은 인구가 몰려있는 현상과 그에 따른 부작용들이 해소되는 것이다. 취업난 현상조차 어쩌면 우리 사회에 필요없는 잉여 인구가 많아서 발생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멜서스 트랩 이론에 따르면 지금의 저출산 현상은 자연스럽게 인구 구조조정이 되는 과정이다. 또한 과거보다 길어진 인간 수명 때문에 고령화 현상이 더 심각해보이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국가를 유지하고 통치하는 위정자의 관점에서 지금 상황을 바라보려는 나로서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생각해보자, 저출산에 의해 이루어지는 인구 구조조정이 사회에 필요없는 잉여 인구의 탄생을 줄여주는 효과가 과연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신생아가 줄어들면 신생아, 유아와 관련된 직업과 조직의 규모도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젊은 세대가 줄어들면 사회복지 규모 축소도 불가피하다. 결국 저출산 현상이 지속되는 이상 취업난 현상도 계속될 것이고, 취약계층과 우리 모두를 위한 사회복지 혜택도 꾸준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애초에 사회에 필요없는 잉여 인구가 많아 보이는 현상은 여러가지 이유가 결합된, 풀기 어려운 실타래 묶음 같은 것이다. 역피라미드 인구 구조는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하는 당면 과제이다.

저출산 현상은 인구 고령화 현상을 심화시킨다. 이는 자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 속에서 사회에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생산 가능한 인구가 부족해진다. 결국 경제생산성이 감소하는 반면에 사회 복지 비용은 증가한다. 다시 말해 젊은 세대가 노령 세대보다 부족한 사회는 재정적으로 문제가 있을 것이고, 앞서 언급했듯이 자연스럽게 사회에 대한 투자가 줄어든다. 이는 곧 사회의 경제성장률이 떨어진다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번에는 국제관계 속 힘겨루기 측면으로 넘어가보자. 구성원 숫자가 적을수록 그 조직, 사회, 국가의 유지력과 힘이 약하다. 반례로 북유럽 국가를 드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비슷한 수준의 두 국가를 비교한다면 인구가 많은 쪽과 적은 쪽 둘 중에 어디가 더 강한 국가일까? 저출산으로 인해 인구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현상을 방치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굶어서 체중을 줄이는 행위랑 똑같지 않을까? 게다가 오히려 북유럽처럼 좋은 인프라를 갖춘 지역일수록 인적자원면에서 사람 한 명의 가치는 클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 우리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게임으로 비유해보자. 생산 건물 하나와 생산 건물 100개에서 같은 시간에 생산할 수 있는 병력 규모의 차이는 크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체급이 낮은 국가가 체급이 큰 국가를 이기기 힘든 이유는 여기에 있다. 회복탄력성 관점에서 체급이 큰 국가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간단한 예시로 누구나 알만한 위촉오 삼국지를 들자면, 인구가 많았던 중원지역을 위나라가 먹은 시점에서 이미 촉나라와 오나라의 승리 가능성은 지극히 낮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을 기계로 대체하는 완전 자동화는 아직 실현불가하기 때문에 여전히 어떤 분야에서든 인구가 가지는 힘은 크다.

혹자는 출산율이 낮으면 이민자들을 받아들여서 부족한 수를 메우면 된다고 하지만 신중할 필요가 있다. 나는 다문화 정책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긴 역사를 볼 때 서로 다른 문화가 조화롭게 섞이는 경우를 찾기 어렵다. 대한민국 인구 5천만 명 중 1000만 명이 한국 문화에 제대로 녹아들지 않는 이민자로 이루어진다면, 한국은 두 집단으로 분열될 것이고 각 집단을 대표하는 리더가 따로 생길 것이다. 우리에게는 스스로 대한민국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인 정체성을 가진 아이가 필요하다. 따라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다인종 국가가 되는 미래를 지향할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국가가 필요하고 유지되어야만 한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국가가 왜 생겨났는가.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국가 소멸 위기 속에서 그냥 자연스럽게 국가가 없어지게 놔두자라는 사람이 있는데 다시 생각해보자고. 먼저, 누구나 살아가면서 자신의 국적을 선택할 수는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불문하고 자신이 언제나 인정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자기가 태어난 국가일 것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사회복지를 충분히 확대해서 취약계층을 보호하려면 젋은 부양세대가 많이 필요한데, 애초에 왜 사회보장제도가 필요하냐면 사회 구성원 전체를 위해서 그렇다. 복지가 취약해지면 가장 먼저 피해 받는 것은 하위계층이겠지만 길게 보면 상류층 또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잃어버릴 것이다. 사회구성원들이 서로 보호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절대적인 상류사회가 존재하겠는가. 1789년에 프랑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떠올려보자. 그리고 비스마르크가 왜 그토록 복지정책에 신경썼는지 생각해보자.

결국 단지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위해서 우리 모두를 위한, 공리주의 방식의 출산율 안정화 정책에 반대하는 것은 현재 세대와 미래 세대가 안게 될 고통을 외면하는 행위이다. 가벼운 존재를 추구하는 사비나의 삶은, 다시 말해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가만히 있는 것은 우리 시대의 문제를 방관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일어나고 있는 일인데 관찰자처럼 바라만 보는 것은 후대에 전할만한 좋은 모습이 아닐 것이다.